어느 날, 심리학과 학생 대표가 저를 찾아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교수님 강의를 거부하겠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에 저는 당황했습니다.
‘내 강의 내용이 마음에 안 들거나 부족해서 그러나?’
속에서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담담히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학생이 뜻밖의 대답을 하는 거예요.
“교수님은 미제(美帝) 앞잡이기 때문에 강의를 들을 수 없습니다.”
아주 당당하게 말하더군요.
저는 안심이 되기도 하고, 흥미도 있어 물어봤어요.
“내가 미제 앞잡이니?”
“선생님은 골수 미제 앞잡이십니다.”
“내가 왜 미제 앞잡이니?”
“미제 앞잡이가 되려면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선생님은 그 요소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첫째 미국에서 공부한 것, 둘째 강의 시간에 영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 셋째 기독교인이라는 거였어요. 저는 ‘기독교인’이 미제 앞잡이의 요소라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덕분에 보름 정도 강의를 할 수 없었지만, 이후 학생 대표가 다시 강의해 달라고 요청해서 못 이기는 척 받아주었습니다.
몇 년 후, 한국 주요 교단의 신학대 교수인 지인이 상담심리학 강의를 한 학기 해달라고 제게 부탁했어요. 앞으로 목사가 될 학생들이 인간의 심리와 상담에 대해 알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흔쾌히 “그럽시다, 교회가 인간에 대해 너무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잘됐습니다”라며 승낙했어요.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신학대에 가서 열심히 강의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강의실이 텅 비어 있는 거예요.
‘이 학교에 특별한 행사가 있거나 개교기념일이라서 휴강하는 날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른 강의실을 둘러봤어요.
그랬더니 다른 강의실에는 학생들이 빽빽이 앉아 있는 겁니다. 사실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학생이 하나도 없으면 굉장히 당황스럽습니다. 그 이유도 모르면 더 놀라지요. 저는 학생 대표에게 전화했습니다.
“왜 학생들이 한 명도 없나요?”
“교수님 강의를 안 듣기로 결의했습니다.”
“왜 제 강의를 안 듣습니까?”
“우리는 신본주의에 근거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인본주의를 가르치는 심리학자의 강의는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연락을 좀 미리 줬으면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 오지나 않았을 텐데…. 그리고 목회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사람을 잘 모르면서 어떻게 목회한단 말인가?’
여러 의문과 상념(想念)이 겹쳐서 한동안 텅 빈 강의실에 혼자 있다가 참담한 마음으로 신학대학 교정을 떠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교수 생활을 하며 겪은 황당했던 사건을 먼저 소개하는 이유는 저에 관한 판단의 정확성 여부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는 과연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지금 이 책을 쓰는 한성열은 과연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은 ‘빨갱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미제 앞잡이’, 어떤 사람은 ‘인본주의자’라고 하면서 저를 거부했는데, 저는 과연 누구일까요? 글쎄요, 저도 제가 누구인지 한마디로 답하기가 어렵네요.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생각이 있기도 하고, 다른 주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이기도 합니다. 또 미국에 대해 어떤 면에서는 호의적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해요. 또 제가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인간 중심 사고를 하는 면이 있는 것은 당연해요.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인간은 심리학이라는 학문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더 넓고 깊은 존재라는 사실도 깨닫고 있어요.
“그럼 저는 누구인가요?”
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지금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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